용계동
위치
추동.마산동 동쪽에 있던 마을로서, 마을 전체가 대청댐 건설로 물에 잠겼다.
유래
용이 살았다는 못이 냇가에 있는 용지말, 용계말에서 유래되었다. 즉, 용계말의 용 용(龍)자에 시내 계(溪)자를 그대로 동의 지명으로 하였다.
연혁
백제대는 우술군, 신라때는 비풍군, 고려초기에는 회덕현에 속했다가 현종 9년(1018)이후에는 공주부에 속했다. 조선시대 초기 회덕현, 조선 말 고종 32년(1895)에는 회덕군 동면의 지역이었는데,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1914년에 성산리, 장천리, 관동, 추하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용계리라하고 대전군 동면에 편입하였다. 그 후 1935년 11월 1일 대전부 신설에 따라 대덕군에 편입되었으며, 1989년 1월 1일 대전시의 직할시 승격에 따라 대덕군이 직할시에 편입되어 행정동인 추동의 일부로 소속되었다가 1995년 1월 1일 대전광역시 동구 용계동으로 명칭 변경되었으며 현재 행정동은 대청동이다.
지명
가시나무골[골] | 성미 뒤, 고봉산 서북쪽에 있었으며 가시나무가많아 가시나무골로 하였다. |
---|---|
성미(성산, 서봉부곡)[마을] | 용지말 북서쪽에 있던 마을로서 용지말과양청이 사이에 있었다. 고려시대부터 서봉부곡이 있었던 지역으로‘서봉부곡’으로불리다가, 비룡동 질티성(성) 산끝(미)이라고 하여 성미라고 하였다. 또는 비룡동에 있는 질티성이 자리한 산의 끝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붙여진 이름이다. |
양청이(양청, 양천)[마을] | 성미 동북쪽에 있던 마을로서, 남쪽에서흘러오는 냇물과 서쪽에서 흘러오는 냇물이 합하여 북쪽으로 흘러가는곳에 마을이 위치하였으며, 양청이는 동네가 양달지고 절묘하며 주변이푸르른 곳으로 남쪽내와 서쪽내가 서로 합수한 곳이라 하여 양청, 또는 양천이라 불려졌다는 설과, 냇물이 장마철에 항상 넘쳐 냇가에버드나무를 심어서 홍수피해를 막았다는 전설 때문에 양처이라고 이름붙여졌다는전설이 함께 전하는 마을이다. 따라서 이곳을 속칭 양청이라고 했다. |
용지말(용계말, 용계)[마을] | 성미 남동쪽에 있으며 용이 살았다는 못이냇가에 있어 용용자와 시내 계자 혹은 연못 지자를 따서 붙였다. 용계 입구엔 가지가 멋지게 뻗은 고목나무가 있었으며, 해마다 정월보름에는 떡과 과일을 차려놓고 초저녁부터 새벽닭이 울 때까지 일년동안재액이 없도록 고사를 지냈었다. |
치알바위[바위] | 양청이 서쪽에 있었으며 바위의 모양이 햇빛을가리기 위해 치는 차일바위라고하였다. |
치알바위골[골] | 양청이 서쪽에 있었으며 치알바위가 그 골짜기에있어 치알바위골이라고 하였다. |
토속
용계동의 범바위, 용계동의 산삼과 고목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