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별동
위치
법정동인 대별동은 동쪽으로 낭월동과 접해 있고 남쪽으로는 이사동과 접해 있다. 북쪽으로는 중구 옥계동, 효동과 구계를 이루고 있다.
유래
나월의 서쪽 이사동과의 중간에 자리하고 있는 대별동은 큰 자라와 깊은 인연이 있는 지역으로 전해오는데 이 대별이 자라와 특별한 인연을 갖고 있는데에는 다음 몇 가지 유래가 있기 때문이다.
그 첫 번째는 대별이 뒷산인 비파산에 올라 이곳을 내려다 보면 대별동의 지형이 마치도 큰 자라이 형국이라는 풍수설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다.
둘째는 옛날 이 곳에는 큰 연못이 있었는데 그 못속에는 커다란 자라가 살았기 때문에 큰 자라가 사는 마을이라 하여 대별리라 불렀다는 설도 있다
셋째는 지푸재의 입구 비파산의 아래에는 사육신의 한 분인 박팽년 선생의 증조부이자 순천박씨의 중시조인 박원상의 묘가 있는데 그 묘자리가 큰 자라의 형국을 한 명당이라는 풍수들의 말에 따라 이 지역을 대별리라 하였다는 설이다.
넷째는 조선조 중기에 송촌동에 사는 송담 송남수가 아버지 안악공의 산소를 이사동에 모시고 매일 이곳을 지나 성묘를 다녔는데 하루는 삼사이이 장마비로 냇물이 크게 불어서 건널 수 없게 되어 낭패스러워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큰 자라 다섯 마리가 떠올라 징검다리를 만들어 효자 송담을 성묘하도록 무사히 건네게 하였다는 전설 등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이 지역을 큰 대(大)자 자라별(鼈) 대별리(大鼈里)라 부르게 되었는데 이 자라별자의 표기가 너무 까다로워 언제부터인가 쉬운 분별 별(別)자로 고쳐 대별리(大別里)라 부르게 도었는데 1989년 대전이 직할시로 승격됨에 따라 대별동(大別洞)으로 부르게 된 것이다.
연혁
백제시대에는 우술군에 속했으며, 신라시대에는 비풍군에 속하였다. 고려때는 공주부에 속했다가 조선시대 초기에는 공주군에 속했다. 이 지역은 본래 공주군산내면의 지역으로서, 고종 32년(1895)지방관제개정에 의해 회덕군에 편입도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의하여 돈리, 백운리와 외남면의 대별리 일부를 병합하여 대별리라 하여 산내면에 편입되었다. 그러다가 1935년 11월 1일 대전부 신설에 따라 대덕군에 편입되고 그후 1989년 1월 1일 대전직할시 승격에 따라 대전직할시에 속하게 되었다가 1995년 1월 1일 대전광역시 동구 대별동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현재 행정동은 산내동이며 은진 송씨의 집성부락이 있다.
지명
감마무골[마을 | 감마무골[마을] 도니골에서 서남쪽으로있는 마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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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너뜰[들] | 안대별에서 동남쪽에 있는 들이다. |
고려장[골] | 대별마을 북서쪽 고려장이 있던 골짜기 이름이다. |
구구리모탱이[모롱이] | 석척산 아래 있는 모퉁이이다. |
내골[골] | 대별마을 남쪽에 있는 다리샘골 왼쪽 골짜기이다. |
노루고개[고개] | 양정에서 석천리 가는 고개이다. |
누에머리[산] | 대별동에서 지프재 오른쪽에 있는 봉우리이다. |
다리샘[샘] | 다리샘골에 있는 물이 많은 샘으로 약수라고한다. |
다리샘골[골] | 대별마을 북쪽 성불사 옆에 있는 다리심이있는 골짜기이다. |
도니골[돈리, 동이골][마을] | 대별마을 남쪽 산아래 마을리고 지푸재 아래에있는 돈리는 돈이골이라고 흔히부르는데 그 냐력은 첫째 이 마을이생길 때 순천박씨가 돼지골에다 묘를 썼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처음에는돼지돈(豚)자의 돈리(豚里)이었던 것을 돈(敦) 자로 고쳐 표기하였다는설과 둘째 옛날 이곳에 찬물이 솟는 샘골이 있어 그 물을 길어가기위해 아낙네들이 물동이를 이고 드나들던 동네라고 하여 동이골이라불렀는데 뒤에 한자음으로 표기함에 따라 돈리(敦里)로 부르게 도었다는설도 함께 전하고 있다. |
도둑골[골] | 석천산에 있는 큰 골짜기로 옛날 도둑이소를 잡아 먹었다고 해서 도둑골이라 했다고 한다. |
돈미골[골] | 돈미들 남쪽의 골짜기와 마을의 통칭이다. |
돈미들[들] | 안대별 서쪽에 있는 들 이름이다. |
매봉재[고개] | 지프산 앞에 잇는 고개이다. |
배우니(백운, 백운리)[마을] | 이는 대별동의 남동쪽에 위치하고 이 곳에있던 연못에 살던 커다란 자라가 연못 위에 올라와 놀면 흰구름이떠 내려와 그 자리를 보호해 준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즉 이곳은흰구름이 떠 내려와 맴도는 연못이 있는 마을이라는 것이다. |
벌뜸[마을] | 대별동의 동쪽편에 위치하고 벌밭에 새로생긴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범바위[바위] | 대별마을 북서쪽에 있는바위로 옛날에 호랑이가 와서 앉아 놀다간 바위라 해서 불당골[골] 붙여진 이름이다. 전에는 논밭이 개간되기 전이라 진펄로 대단히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어떤 이는 이 곳의 땅이 기름진 옥토이기는하나 땅이 질퍽거린다고 해서 진벌이라 부른다고 하기도 한다. 대청댐의완성으로 물에 잠긴 곳이다. |
비파령(지프재)[고개] | 대별동에서 소호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며고개 양쪽에 있는 바위들이 마치 비파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새뜸[들] | 배원이와 벌뜸사이에 있는 들판이다. |
석천산[산] | 대별마을 동남쪽에 있는 돌이 많은 산이다. |
석천산강변옥녀탄금[내] | 석천산 아래 있는 강변으로 옥녀가 가야금을타는 형국으로 경치 좋은 강변이라 하여 그리 부른다. |
성불사[사찰] | 금산가는 길에서 대별교 맞은편에 있는 절로대웅전을 비롯해 요사채와 성불 어린이집이 있다. |
수리바위날[산] | 지프재 왼쪽에 있는 봉우리이다. |
사리골[골] | 대별마을 동남쪽에 있는 식장산 아래 골짜기이다. |
안대별(내대별)[마을] | 대별동의 안쪽에 있는 마을 이름으로 대별동의 안쪽에 위치해 있다하여붙여진 이름이다. |
안대별둥그나무[나무] | 안대별 길가에 있는 버드나무로 둘레 5미터, 높에 17미터 가량의둥구나무이다. |
애바우[바위] | 대별마을 북쪽 중뜸에 있는 바위로 옛날 이 바위 위에서 어린아이가낚시질을 하다가 커다란 고기가 낚시대를 끌도 가자 어린아기가 물속으로뛰어들어 낚시대를 잡으려다가 물에 빠져 죽은 바위라고 하여 붙여진이름이다. 또는 예부터 이 바위를 정성드려 위하면 자손이 없는 사람은자손을 두게 되고 자녀를 둔 사람은 병이 없이 잘 자란다는 전설을간직하고 있는데 애바우 또는 아암이라고도 한다. |
언고개[고개] | 도니골 너머에 있는 고개이다 |
자라교[다리] | 대별마을 안대별과 중뜸을 연결하는 조그만 다리이다. |
장성골[골] | 대별동에서 이사동으로 넘어가는 길목으로 장승이 서 있는 골짜기라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장송골[골] | 대별마을 서쪽에 있는 골짜기이름으로 이 곳에는 장승이 서 있는데, 그 장승이 서 있는 마을이라 하여 장승골이라 부르던 것이 음이 변하여 지금은장성골, 장송골이라고 한다. |
중뜸[마을] | 대별마을 대별교 건너 북서쪽에 있는 마을이름이다. |
중시밋들[들] | 대별동 남쪽으로 펼쳐져 있는 들 이름이다. |
중심이[마을] | 지프재 아래 동쪽에 있는 마을 이름이다. |
지프재고개날망[마루] | 지프재산 동남쪽에 있는 산마루이다. |
지프재방죽[못] | 대별동에서 지프재로 가는 오른쪽에 있는 물웅덩이이다. |
지프잿골[골] | 대별동에서 소호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며 고개 양쪽에 솟아 있는바위가 마치 비파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 바로 지프재인데, 이 고개가있는 골짜기를 말한다. |
찬샘[샘] | 남서쪽 도니골에 있고 물이 아주 차가운 샘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피부병이 있는 사람이 몸을 씻으면 병이 없어진다고 한다. |
참상골[골] | 대별마을 남서쪽 도니골 옆에 있는 골짜기이다. |
참상골날망[마루] | 지프재 오른쪼게 있는 참나무가 많은 곳이다. |
큰매골[골] | 대별마을 서쪽 두리봉 뒤에 있는 골짜기이다. |
팽개바위[바위] | 대별마을 남쪽 지프재 산에 있는 바위로 가까운 것 같아서 돌을던져도 그 곳에 까지 날아가지 않는다고 하여 붙여진 바위 이름이다. |
풍죽골[골] | 싸리골 왼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
할미바위[바위] | 지프재 약수터 근처에 있는 바위로 바위의 모양이 할머니처럼 생겨서붙여진 이름이다. |
회나무골[골] | 대별리 북서쪽에 위치한 안대별 밑에 있는 골짜기 마을 끝부분에있다. |